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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GUE 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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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자유

지난 2019년 국제갤러리에서 4년 만에 조형예술가이자 현대미술가 양혜규 작가의 네 번째 국내 개인전 《서기 2000년이 오면》이 열렸다. 최초로 유년에 그린 그림 ‘보물선’이 전시장 입구와 전시 도록에 전면 등장했다. 양혜규는 그 그림에 관해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끄러운 과거들을 다 지워버리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유물 중 하나입니다.” 그의 설치 및 조형 작품의 소재가 되는 종이접기 조각, 빨래 건조대, 전구, 옷걸이, 간장, 된장, 쌀, 블라인드 등은 극히 일상성을 띠고 있어 관람객은 작품으로 ‘처음’ 만날 때 기시감을 안는다.

그러나 작가가 택한 소재들은 단지 물성 자체로만 작품이 되어 전시장에 나와 있진 않다. 그것들은 작가의 경험과 사유를 통과해 ‘살아진’ 것들이다. 그래서 그가 단 하나의 유물을 통해 부끄러운 과거를 다 지워버렸다고 말할 때 의아했고, 곧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과거를 밀어내고, 과거를 잃어야 곧 당도할 시간을 살 수 있다. 그는 지난날을 모두 잃고, 그의 작품은 현재에 살아남는다. 현재만 살아남는 지도처럼, 과거와 경계를 지운 그의 새로운 지도 위로 매일 처음 만나는 자유가 그려진다. 새로운 시공간은 단숨에 전시장 공간을 장악하고, 관람객은 기꺼이 처음 만나는 자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ARTIST HAEGUE YANG EDITOR DANBEE BAE PHOTOGRAPHER YESEUL JUN
THIS PROJECT <PRINTS> WORKED WITH RAWPRESS
TABLE #1
생활, 그 자유의 심연
양혜규 작가의 조형 작품들은 대개 그 부피나 규모가 크고, 소리와 향기가 나고, 빛을 만들어내거나 움직인다. 전시장 공간 전면을 전부 활용할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그의 설치 작품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전시 형태와 방식으로 공간을 장악한다. 관람객이 기꺼이 그의 세계에 감응하고 동화하는 것은 이처럼 모든 감각에 호소하는 그의 조형 예술 세계 때문이다.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서울과 베를린을 기반으로 세계 곳곳을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을 살아 왔다. 변함없이, 최선을 다해 무소속을 추구하는 그에게 일반적인 의미의 거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오랫동안 작업실과 집을 분리하지 않았고, 창고 역시 두지 않았다. 이를 단순히 예술가적 기질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어떤 경향이나 사조 등의 분류법으로 속단하거나 정의 내릴 수 없는 그의 작품세계가 이를 방증한다.
본 인터뷰는 작가의 작업 전반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먹고 마시고 고뇌하는 일상의 장소를 데스크나 테이블로 의미를 점철시켜 작가의 작업과 일상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러나 어딘가에 정착해 있지 않는 그의 작업이 책상 앞에서만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올해 레노베이션을 마친 국제갤러리의 더레스토랑의 벽면과 천장에는 작가의 작업이 설치돼 있다. 벽면에는 런던의 디자이너 그룹 OK-RM과 협업한 벽지 작업 <이모저모 토템>(2013)의 일부가, 천장에는 <솔 르윗 뒤집기 – 22배로 확장되고 다시 돌려진, 열린 기하학적 구조물 2-2, 1-1>(2017)이 설치되었다. 국제갤러리 더레스토랑에서 촬영을 마친 뒤 1층 카페에서 그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그의 일상을 들었다. 이야기는 일상의 사물을 소재로 끌어오는 데 서슴지 않는 그에게 테이블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사용하는지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지금 작가와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곳은 바로 작가의 벽지 작업이 설치된 국제갤러리 내 1층 카페의 한 테이블입니다. 특정한 경험으로 통과하고 사유로 길러진 주변의 일상 사물을 작품의 대상으로 삼는 작가는 테이블 혹은 데스크를 어떻게 바라보고 사용하나요?
우선 저는 테이블과 데스크의 의미를 구분합니다. 보통은 각기 놓이는 장소가 달라 용도가 구분되죠. 테이블은 부엌에 놓이는 식탁이나 거실에 놓이는 탁자, 데스크 혹은 책상은 주로 공부방에 놓이고요. 사실 저는 매우 오랫동안 책상과 밥상을 구별하지 않고 살았어요. 책상에서 밥 먹고, 밥상에서 일하는 식으로요. 딱히 정해진 용도에 상관 않는 편이죠. 베를린 집과 서울 집 둘 다 꽤 작은 편이고, 그곳에 놓인 책상 겸 밥상도 딱 한 개뿐이에요. 혼자서 사용할 수 있는 크기이고, 공간도 책상과 밥상도 일부러 작게 써요. 하지만 제가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거나 출장을 많이 다닌다고 해서 책상이나 밥상과 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어디에 도착하든 제가 사용할 만한 책상 하나 잡으면 그만이죠. 전시 관련해서 출장을 가게 되면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작은 책상 하나 빌려달라고 해요. 그곳에 짐과 자료들을 두고 다니면 왠지 일상을 회복하는 느낌이 들어요. 단지 책상 하나 얻은 셈이지만, 왠지 작은 정착을 이룬 느낌이랄까요? 전 열악한 조건이나 상황이라는 환경에 불구하고, 그 속에서 얻은 성취로부터 느끼는 희열에 애착이 많은 것 같아요.
인터뷰에 앞서, 음식을 앞에 두고 함께 먹으며 인터뷰를 하고자 작가에게 좋아하는 음식이나 요리를 물었습니다. 식도락가가 아니기에 딱히 이야기할 만한 것이 없다는 답변을 주었죠. 지금 테이블에는 따뜻한 로즈 히비스커스 티가 올라와 있어요.
주로 커피를 마시고, 차는 가끔만. 커피는 아침에 일어나서 꼭 마셔요. 하루에 총 세네 잔 정도로 자주 마시게 되는 것 같아요. 커피도 사람마다 취향이 있다거나 어떤 트렌드가 있잖아요. 커피 취향은 클래식한 편인 것 같네요. 저는 그냥 1유로 내고 마시는 기본적인 이탈리아 에스프레소가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단것은 잘 안 먹고요.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되고 전시를 준비하며 3개월짜리 작업실이 처음 생겼다고 들었어요. 2019년에는 처음으로 독일에 창고를 마련했지요. 오랫동안 작업실을 따로 두지 않거나, 작품을 둘 곳이 없어 폐기 처분해야만 했던 상황과 고충에도 불구하고, 창고를 마련하지 않았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마음을 바꿔 작업실과 창고를 마련하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2009년 5월이었으니까 전시 준비는 주로 2008년에 했어요. 당시 작업실이 따로 없는 상태라 집에서 일했죠. 실제로 설치 작품의 부피가 꽤 크다 보니, 비엔날레 측에서 작업실 임대료를 보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임시 작업실을 3개월 정도 잠깐 얻어 썼어요. 이후에 다시 집으로 들어갔고요. 독일에서 처음 작업실을 정식으로 얻은 것은 2010년이에요. 2011년에 3개의 층을 다 사용하는 대형 전시에 초대 받았을 때는 방 한 칸짜리 집에서 작업하며 한계를 느꼈죠.  2019년에는 아는 작가 친구가 창고를 얻으면서 같이 사용할 수 있는 창고 공간이 생기게 된 거예요. 작업실, 창고와 같은 물리적인 작업 환경에 대한 작가적 욕심은 끝이 없다고 봐요. 잘하려면 끝이 없더라고요. 천장도 더 높았으면 좋겠고, 문 폭도 넓고, 쓸 수 있는 공간도 더 여유로우면 좋죠. 앞서 말했듯 저는 약간은 어렵게 느끼거나 아쉽게 느끼는 상황, 뭔가가 잘 안 되는 상황에서 희열을 느껴요. 이를테면, 천장이 낮아서 높이감이 있는 작품 조립이 어려울 때 발휘되는 감각이 있어요. 그 감각으로 뭔가를 상상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성취하는 맛을 잘 알고요. 물론 그래도 작업실을 더 잘 갖추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더 좋은 공간에서 작업하고 싶고, 나은 상황이 주어지면 좋겠죠. 그런데 지금 안 된다고 해서 그렇게 마냥 비관하지는 않아요. 부족한 것도 아직까지는 나름 괜찮고요. 창고는 작업실과는 또 다른 의미의 이야기예요. 작가는 작품을 창작하는 일뿐 아니라 작품의 기록, 각종 아카이빙, 작품 유지 관리, 보수, 작업실 유지와 경영, 일종의 영업 혹은 대표성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해야만 하죠. 뭐 프리랜서의 삶이 다 비슷하겠지만요. 아무튼 제게 창고는 관리의 대상인 ‘과거’를 상징했던 것 같고, 그래서 그간 창고를 오랫동안 외면하고 미뤄야 할 일로 치부했던 것 같아요. 정말 솔직히 앞만 보고 가는 것도 힘에 부쳤고, 일단은 바로 눈앞에 놓인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건 ‘눈 가리고 아웅’이구나 싶어요. 영원히 피터팬으로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에요.
《서기 2000년이 오면》(2019) 전시 전경, Ⓒ안천호
작가는 변함없이, 최선을 다해 무소속을 추구합니다. 일반적 집의 개념인 거처가 존재하지 않고, 오랫동안 따로 작업실을 두거나 창고를 마련하지 않았어요. 서울에 들러 3~4개월 체류하면서도 굳이 부모님 집에서 생활하지 않았죠.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작가를 ‘노마드 작가’라고 칭합니다. 그러나 ‘노마드 작가’라는 말은 오히려 작가를 가두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현재 많은 작가들이 출생국가나 출신 지역 등 보통 정해진 자리라고 기대하는 장소를 기반으로 작업하지 않아요. 작가-이민자인 경우도 많고, 이민자-작가인 경우도 많고요. 저는 이민 온 작가 같은 구석이 있는데, 독일에서 가까이 지내는 친구 중에 이민자 출신 작가가 많아요. 그리고 저희는 다 글로벌리제이션 세대로서 출장을 많이 다녔고, 어쩌면 너무 많은 출장을 다녔죠. 아무튼, 더 이상 물리적인 거리 이동을 했냐 안했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노마드란, 그저 어떤 사회나 장소에 ‘정신적·사회적 거점’을 두느냐 마느냐의 차이에서 오는 것 같아요. 정주하지 않는, 어딘가에 쉽게 정착하지 않는 사고방식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독일에서의 생활에 대해 들어보고 싶습니다. 1994년 서울대 조소과 졸업 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미술대학 슈테델슐레STÄDELSCHULE에서 수학하고 2017년부터는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죠. 독일로의 이주는 작가의 생에서 하나의 방점으로 보입니다. 독일을 비롯해 서구에서 작가의 이름과 존재가 알려진 후에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어떤 결정적인 심리적 이동이 독일로의 물리적 이주에 작용한 건가요?
독일에 대해 기술적이든 문화예술적이든 당시 제가 뭔가를 알고 갔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모르고 간 것이 사실입니다. 결정적인 심리적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매우 복합적일 것이고, 아마도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피상적으로는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 학비가 적은 곳을 선호했고, 그 밖에 다른 환상이나 낭만은 없었어요. 1994년 당시에는 인터넷이나 이메일도 없었고, 편지를 보내면 3주 후에나 도착하던 때였어요. 몇몇 선배들이 독일로 유학을 갔다고 들었지만, 한국에서 단 한 번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기대감이라는 것도 일말의 정보를 알아야 발동하는데, 뭘 알아야 기대를 하죠. 그런데 제겐 모르고 갔다는 것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도약LEAP’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또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제게 ‘도약’이란 수면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과연 할만한 도약인지 모르고 시도했을 때 성립되는 것 같아요. 1994년 서울에서 독일로 향한 저의 무의식적 행동이 ‘도약’에 가깝다면, 그 도약 자체로 의미가 있겠죠.
국내로의 이동이 아닌, 나고 자란 한국 서울에서 떠나는 일이라 막연히 떠나오는 곳으로부터 특정적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어요.
독일에 대한 환상도 없었지만, 한국 생활이나 사회에 대한 특별한 유감이나 반감도 없었어요. 전 당장 내 앞에 발생한 어떤 것, 지금 주어진 무언가에 주목하는 편이에요. 바로 내 앞에 떨어진 일을 ‘어떻게 잘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고, 조건이나 환경을 계산하는 편은 아니에요. 좋게 표현하자면, 선입견이 없다고나 할까요. 사실 저뿐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작업 외의 삶에서 생각보다 소극적이고, 저도 예외가 아닌 것 같아요. 생활에 관계된 매우 단순한 일에도 소극적이거나 심지어 일종의 결정 장애가 발생하기도 하죠. 작가는 전시 초대나 작품을 의뢰 받는 쪽이지, 절대 미술관의 문을 먼저 두드릴 수 없는 직업이에요. 전시에 초대 받는다면 선택권은 “YES” 혹은 “NO”만 있을 뿐이죠. 그래서 대부분은 우직하게 자기 일하고, 사람들은 전시장에 와서 보는 거죠. 작가는 작품 생활에서는 매우 적극적이지만, 그 밖의 일들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도 별로 없고, 신경도 잘 안 쓰는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렇고.
생면부지의 땅인 독일 베를린에서 자주 혹은 주로 먹은 음식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파스타요. 제일 쉽고 편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요리죠. 초기에 베를린 작업실에서는 같이 일하는 작업실 친구들 점심을 제가 다 했어요. 인원이 많아진 다음에는 그러진 못하고 요리해줄 친구를 고용했어요. 사실 베를린에 조금 규모 있는 작가 스튜디오 중에는 요리사를 두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에요. 특히 건축 사무실 같은 곳은 더하죠. 서울에는 아직 이런 규모의 작가 스튜디오가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프로젝트 단위로 작업을 하다 보니, 이루어지는 단체 생활이 단기인 경우가 많고, 작가 생활을 하며 의식주를 함께 할 만한 규모의 작업실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 경제 활동도 쉽지 않죠. 스튜디오에서 요리를 맡아 주었던 친구들은 주로 일본 친구들이었어요. 한 명은 섬유를 전공했는데, 감각이 뛰어나서인지 음식도 창의적으로, 즐겁게, 재미있게 하더라고요. 다른 일본 친구는 이자카야 레스토랑을 하다가 후쿠시마 사고 이후로 일본 사회에 실망하고 베를린으로 왔다고 하더라고요. 식자재는 가급적 원하는 만큼 맘껏 구매해도 좋다고 하니까, 작업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싶은 요리를 마음껏 해줬어요. 정말 고마운 친구들이에요. 그들 덕분에 작업실에서 일하면서 같이 식사를 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는 걸 배웠어요. 지금은 독일 스튜디오 인원이 다시 많이 적어져서 함께 식사하지 않고 각자 따로 해결하고 있고요.
대다수의 인간에게 의식주는 일상을 이어나갈 수 있는 주요한 도구이자 수단입니다. 작가에게 의식주의 중요한 순서를 꼽아본다면, 어떤가요?
어딘가에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은 먹고 살아야 하는 것, 마지막으로 옷을 입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어요.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알 수 없어요. 오래전 대학교 교양수업으로 들었던 복식사에서 들은 일화예요. 인류가 옷을 발명했을 때 ‘보온’의 목적보다 ‘장식’의 의미가 더 컸다는 거예요. 이걸 두고 인간이라는 동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어요. 추위를 막는 보온보다도 방울을 달고 장식하는 게 더 중요하고 절실했다는 걸요. 학습 능력이 없어서 음식이나 인테리어 등 다른 기타 의식주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건 아니에요. 그냥 관심을 접어두고 느낄 수 있는 해방감이 더 크기 때문이에요. 어느 순간부터 먹고 마시는 것에 쏟는 감각적 안테나를 접었어요.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생활에서 무척 자유로워요. 정해진 에너지와 시간을 꼭 집중이 필요한 곳에 몰입해 소진할 수 있으니까요.
노마드란,그저 어떤 사회나 장소에 ‘정신적·사회적 거점’을 두느냐 마느냐의 차이에서 오는 것 같아요. 정주하지 않는, 어딘가에 쉽게 정착하지 않는 사고방식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서울과 베를린이 있지만, 작가에게는 세계와 우주가 모두 타향이자 집이 될 수 있고, 반면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곧 어디서든 이방인일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방인은 한없이 자유롭지만 동시에 고독한 양면적 숙명을 지니고 있어요. 고독과 자유를 어떻게 분리하거나 다르게 생각하나요?
단답형으로 대답하자면 고독, 자유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느끼겠죠. 다만 느낌에 대한 자의식을 가지느냐 아니냐를 묻는다면, 분리해서 보지 않고 연결해서 본다고 말할 수 있어요. 자유라는 건, 자유로운 상황에서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보다 구속되거나 억압된 상황에 놓인 줄 알고 있다가 그로부터 발견한 극적인 해방감으로부터 느끼는 경우가 더 많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자유라는 개념은 상대적일 수 있어요. 자유롭게 자기의 꿈을 좇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직장에서, 가정에서, 심지어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스스로 많은 구속을 느끼거나 선택권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죠. 어쩌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누릴 수 있는 만큼의 모든 자유를 다 즐기지 못할 때가 많아요. 느낌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자유를 느끼고 발현하기 위해 자유에 대한 주인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느낄 수 있게 된다고요. 개인적으로 최근에는 구속이나 억압 안에서 자유를 보다 깊이 인식하고 있어요. 굉장히 자유롭게 생활하고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미술작가라는 직업의 노예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어요. 직업 안에서 느끼는 자유의 형태를 명확히 이야기할 수 없고 순간순간 자유를 느끼고 확인하는 정도에 그치지만, 최대한 자유를 의식하고 누리려고 노력해요. 나는 미술작가이기에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스스로 힘을 주는 거죠. 고독에 대해서는 그에 반하는 것을 빌어 설명하는 게 좋을 듯해요. 고독의 반대는 공감이라고 생각해요. 공감을 주고 받았을 때 우리는 고독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서로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관계는 헛돈다고 느껴요. 운명이죠. 특별히 이를 측은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저 공감이라는 감정을 누군가와 나누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적극적으로 공감을 표하게 된다면, 공감을 받게 될 확률도 높아지지 않을까요.
현장 답사를 위해 끊임없이 세계 곳곳을 여행해 왔어요. 현재 기후변화로부터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형태의 재난으로 인해 많은 일상의 영역이 불가능해졌어요. 마음껏 세계를 다닐 수 없는 요즘의 일상과 상황이 더욱더 갑갑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혹 여행 대신 요즘 습관처럼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한국에 입국한 지 6개월이 넘었네요. 기본적으로 뉴스 중독이 있어요. 독일 뉴스는 물론이고, 미국 라디오, 영국 신문 등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된 매체 여럿을 헤드라인이라도 매일 살피거든요. 동시에 한국 뉴스와 신문도 매일 훑기는 하는데, 지난 6개월 간 실시간으로 한국 소식을 접하니 느낌이 또 달라요. 사회와 현실을 높은 몰입도로 흡수할 수 있는 동시에 한국 사회 밖을 향한 공감대가 좁아지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과 회의가 들어요. 한국의 뉴스가 유달리 해외 소식에 인색하잖아요. 그래서 우리 눈앞에 닥친 사회 문제에 급급하게 되고, 하나의 상황을 서로 다른 지역 혹은 관계 맺는 것들을 토대로 큰 그림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대중에게 길러주지 못하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일간지에서는 매우 드문 일인데, 실제로 해외의 많은 매체들이 1면 톱 기사로 자국이 아니라 해외의 소식을 다룬다는 것에서 느낄 수 있는 바가 있죠. 이런 상황이 조금씩 답답해지기 시작했어요. 떠날 때가 됐나봐요.